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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beethoven

베토벤 교향곡 제5기 #4 - 카라얀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by iMac 2017. 3. 29.


카라얀, 그1


카라얀과 베토벤 교향곡에 대한 생각은 어딘지 복잡 미묘하다. 개인적으로 카라얀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생각해서 카라얀의 진정한 장기는 다른 분야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는 늘 살짝 아쉽게 생각하곤 한다. 이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움.


카라얀/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1~55)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눈 앞에 흡사 액스-마키나 처럼 등장한 월터 레그 덕에 카라얀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이야기는 앞서 빈 필과의 베토벤 교향곡 녹음에서 언급했었다. ( 2017/03/05 - [Classical Music/beethoven] - 베토벤 교향곡 제4기 - 간주곡 )


전쟁 직후 공개 연주회에 이따금씩 제동이 걸리는 상황에서 월터 레그는 카라얀과 레코딩 계약을 통해 그러한 제약을 빗겨갔다. 나름 확고한 취향을 가졌던 월터 레그는 그러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다른 사람들과 썩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뭔가 답답함을 느꼈는지 아예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까지 만들어서 이런저런 사람들의 간섭 없이 레코딩을 하고 싶었나 보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는 레그의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게 된다.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를린 필로 완전히 옮겨 가기 전까지 숱한 녹음을 하게 되는데 카라얀의 7~80년대 녹음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필하모니아와의 녹음은 상대적으로 칭찬하는 경우를 종종 본 적이 있다. 과연 그럴까?





첫번째 베토벤 교향곡 전집


카라얀 이전에도 지금까지 본 것처럼 많은 지휘자들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지휘, 녹음해 왔지만 어쩐 일인지 카라얀이 전곡 녹음의 선구자처럼 인식되는 것을 종종 보게된다. 객관적인 사실에 비추어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이 세트를 잘 들어보면 그 이전의 다른 연주들과는 관점이 분명 다르다는 것은 느껴진다. 


단일 지휘자에,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의해 스튜디오에서, 그 이전까지의 그 어떠한 연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높은 완성도로 다듬어진 연주. 레코딩을 염두에 두고 진행한 이러한 시도는 거의 처음일 것이다. 


물론 이 녹음도 전체적인 완성도라는 점에서는 아쉬운 구석이 없지 않다. 우선 꽤 긴 기간 동안 녹음이 진행되다 보니 8번만 스테레오로 녹음되었는데, EMI가 신기술 도입에 보수적이었던 탓으로 지금 생각하면 두고두고 안타까운 노릇이다. 음향적으로 한 곡만 따로 노는 분위기가 '전집'이라는 통일성을 흔들어 놓는다. 워너에서 새로 리마스터링해서 출시한 세트에는 처음으로 9번 스테레오 버전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정쩡한 초창기 스테레오보다는 차라리 잘된 후기 모노녹음이 더 낫다. 


그 외에도 1~3번은 내가 듣기엔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녹음 탓인지 적어도 내 귀에는 아무리 들어도 답답하게 들리는데, 계속 듣다보면 녹음의 문제도 있지만 훗날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던 카라얀의 매너리즘이 이무렵부터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4번 이후부터는 전체적으로 들을만 하다. 5번도 명불허전 잘 하긴 했는데, 확실히 이전 빈 필과의 녹음에서 보여준 처절함은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좋게 말하면 순수함과 건강한 활력이 담겨 있는 연주라 할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아직은 어딘가 모르게 노련함과 훗날 카라얀하면 떠올리게 되는 고도의 세련된 음색에는 미치지 못한다. 카라얀도 좀 더 원숙해질 필요가 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또한 열심히 잘 한 정도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카라얀이 떠나간 이후 필하모니아와 새롭게 전설을 써내려간 클렘페러의 전집과 비교해 보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카라얀의 베토벤은 카라얀 자신이 체득해온 독일, 오스트리아의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 연주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요즘 내 취향으로는 물론 여전히 훌륭하긴 하나, 이상형은 아니다. 전통적인 가필이나 반복구 생략의 문제는 개인적인 취향에서 특히 아쉽다. 전원교향곡의 경우 카라얀의 전원 중 제일 낫게 들리긴 하는데 3악장 A-B-A-B-A'를 A-B-A' 로 잘라 버린 건 정말 너무했다. 이렇게 잘해 놓고 이렇게 싹뚝 잘라버리다니. 이 부분은 5번 3악장의 구조와 연결하여 확장시킨 문제인데 나중에 따로 포스팅하고 싶다. 


50년대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전집 중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녹음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만 하지만, 이상적인 베토벤 교향곡 연주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대답을 주저할 수 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카라얀 자신의 개성이 보다 강렬하게 각인된 베를린 필과의 이후 전집들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잘 하긴 했으나, 베를린 필 전집을 치워버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