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흐름
헤르만 셰르헨(Hermann Scherchen, 1891~1966)은 독일 지휘자로서, 오늘날 20세기 초 현대음악 보급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말러에 대한 공헌도 잊을 수 없어서 초창기 말러 해석가의 주요 인물로 꼽을 만 하다.
헤르만 셰르헨, 1951~1954
쇤베르크 같은 현대음악 보급에 힘썼던 인물 답게, 그가 남긴 베토벤 교향곡 녹음들도 분명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다. 이 연주들을 들어보면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연주들과는 '또 다른 흐름'이 등장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타라 (tahra)
잘 알려져있다시피, 히스토리컬 녹음 발매로 유명했던 타라 레이블의 운영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헤르만 셰르헨의 딸인 미리암 셰르헨이었다. 푸르트벵글러 녹음으로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셰르헨의 녹음들도 제법 잘 정리해서 출시했었다. 1951~1954 기간에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의 연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교향곡 제1번 (1954년)
교향곡 제6번 '전원' & 제7번 (1951년)
교향곡 제9번 '합창' (1953년)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교향곡 제3번 '영웅' (1951년)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교향곡 제2번, 제4번, 제5번, 제8번 (1954년)
서로 다른 세 개의 오케스트라, 그것도 빈과 런던으로 나뉘어 녹음되어서 일관된 형태의 '전집'으로서의 느낌은 솔직히 아쉽다.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카라얀/필하모니아의 전집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러한 차이점이 느껴진다. 이른바 '상품'으로서 훨씬 더 잘 다듬어져 나온 카라얀의 것과 비교하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50년대 이루어진 녹음 중에서는 가장 흥미로운 연주로 이것을 꼽고 싶다. 전체적으로 음악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전혀 색다르다. 전투적인 해석이라면 토스카니니의 연주도 이미 충분히 그러했지만, 셰르헨의 것은 그것과도 또 다르다. 날카롭고, 단호하며 감정보다는 엄정한 음향의 구축이 돋보인다.
적어도 나에게는 토스카니니의 연주가 다소 강박적인 스타일로 느껴졌다면, 셰르헨의 접근법은 그러한 느낌은 깔끔하게 제거되어 담백하면서도 악보를 투명하게 비추는 칼날같은 단호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토스카니니보다 더 호소력이 있고 손이 더 자주간다. 여전히 경탄할만 하지만 이제는 종종 무겁고 부담스러운 푸르트벵글러에 비하면 동시대 연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세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스타일을 두고 셰르헨, 라이보비츠, 길렌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20세기 음악의 대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대작곡가다운 엄정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자세로 악보를 투명하게 투시하는 접근법.
물론, 셰르헨의 이 전집도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반복의 문제, 3번 1악장 코다의 관행적인 가필. 그렇긴 해도 '음악의 정신'이라는 점에서는 새로운 충격을 안겨주는 연주임에 틀림없다. 5번 1악장이 제시부 반복을 하고도 6:51라는 점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개인적으로는 8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이 이리저리 비교해서 들어보면 의외로 제대로 연주해내기 쉽지 않은걸 느끼게 되는데 셰르헨의 이 연주는 그것을 제대로(!) 해냈다. 팽팽하고 단호하며 투명한 구조 속에서 살아숨쉬는 탄력이 넘친다. 더도 덜도 아닌 적확한 바로 그 느낌!!
모노 녹음과 여러 오케스트라의 녹음이 섞여 있는 점, 시대적 한계 부분 등 아쉬움은 없지 않지만 연주 자체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의 매력은 비교불가 수준이다. 오늘날 주류가 된 베토벤 해석의 진정한 선구자로서 여전히 매력만점인 멋진 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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