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곡 마지막 희망 (Letzte Hoffnung)
방랑끝에 죽음의 냄새를 맡고 까마귀가 따라오더니 이제는 흔들거리는 나뭇잎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본다. 음악적으로 아주 대담한 곡이라고 생각되는데, 처음 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피아노의 독특한 음형이 그러한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뭇가지에서 바람에 흔들려 곧 떨어질 것 같은 나뭇잎의 모습 같기도 하다.
스트라빈스키의 계속해서 변화하는 리듬과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음악으로 겨울 나그네의 엄청난 음악적 깊이를 새삼 깨닫는다. 언제 들어도 놀랍고, 새로운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음악이다.
17곡 마을에서 (Im Dorfe)
내가 듣기에는 어슬렁거리는 느낌이랄까? 혹은 가사 속 내용 처럼 온 마을이 잠들어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지나가기 위해 슬금슬금 지나가는 상황처럼 들린다. 그 와중에 개가 짖고 사슬이 덜컹거린다.
슈베르트 음악 속의 '반복'에 대한 부분을 살짝 짚고 넘어간다. 유사한 예시로 보스트리지는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D.795중 16곡 '좋아하는 색'을 골랐다. 슈베르트 음악의 반복이야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고 또한 이야기 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 '좋아하는 색'만 살짝 들어보면 사랑하는 아가씨가 좋아하는 색이 녹색이어서 자신도 좋아하는 색이 녹색이었는데, 실연하고 나자 그 다음 곡인 17곡에서는 다시 '싫어하는 색'이 되어버린다.
18곡 폭풍의 아침 (Der Stürmische Morgen)
겨울 나그네 전곡 중 가장 짧은 곡. '다소 빠르고 힘차게' 부르는 곡. 전투적인 행진곡풍으로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곡인데, 보스트리지는 이곡과 다음 곡은 공백없이 넘어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들어보면 수긍이 가는데, 짧지만 왁자지껄 울퉁불퉁한 행진곡풍으로 힘차게 외치다가 한순간에 아스라한 왈츠풍으로 넘어가는 대비의 효과가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하이든, 오라토리아 '사계' (존 엘리엇 가디너)
19곡 환상 (Täuschung)
겨울 풍경 속에서 헤매고 다니는 나그네의 모습을 그린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사계' 중 한 곡이 맨 처음 소개된다. 찾아보니 no.32 농부 루카스의 아리아이다. 그나마 루카스는 깜빡이는 불빛을 발견하고 구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겨울나그네의 주인공은 그렇지 못함을 알기에 안쓰럽다. 역시 덕분에 간만에 들어본 하이든. 제대로 열심히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하이든은 언제, 무슨 곡을 들어도 멋지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토록 하이든을 멋지게 연주한 가디너가 하이든 교향곡을 녹음 안한 것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의아한 것은 덤.
불빛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9곡 도깨비불도 떠오르지만 이 곡은 시작부터 아주 전형적인 춤곡의 분위기이다. 사랑스러운 왈츠풍의 음악과 끝내 위안받을 곳을 찾지 못하고 '환상'만이 위안을 주는 나그네의 현실이 대조를 이루며 절망감을 심화시킨다. 아이러니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흥겨운 듯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닌.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 그런 상황.
이 이야기에서는 춤곡을 사랑했던 슈베르트의 모습이 나온다. 실제로도 많은 양의 춤곡을 썼고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고 한다. 간편하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연주가 브렌델의 슈베르트 피아노곡 모음집에 포함된 16개의 독일무곡 D.783. 덕분에 오랜만에 들어보는데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감흥이 느껴진다. 단순한 춤곡이 아니라 세련된 감수성도 함께하는데 짤막짤막 계속 이어지는 것이 편안하게 듣고 있기에 좋다. 그렇지만 마냥 이지 리스닝으로 볼 것도 아닌 것이, 그러는 가운데에도 순간순간 쓸쓸한 순간들이 스쳐지나가며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동시에 지금까지 종종 계속 짚어보던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펼쳐진다. 빈이라는 도시는 춤에 열광하던 곳이 아니던가? 하지만 춤에 대한 열광은 1820년대 억압적인 정권 입장에서 다수의 사람이 모여서 춤을 추는 행위는 무질서를 일으키는 행위로서 감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슈베르트가 춤곡을 연주하고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춤을 추다가 경찰이 찾아와 춤 추지 못하게 하는 일화에서 슈베르트 또한 당국으로부터 괴롭힘 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래저래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예술가로서 살아가기 힘든 시대였다.
가사 중 나오는 '공포'라는 단어를 매개로 '백조의 노래' D.957중 13곡 '도플갱어'로 마무리된다. 제목도 공포영화스럽고 실제 가사 내용도 비참함과 오싹함이 공존하며 노래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준엄하게 부르고 있어서 사뭇 공포스럽다. 아주 대놓고 공포스러운 '도플갱어'에 비하면 '환영'은 아주 달콤한 왈츠풍의 음악에 포근하게 담겨있지만 그렇기에 앞서 말한대로 역설적인 상황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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