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lassical Music/beethoven

베토벤 교향곡 제3기 #3 - 푸르트벵글러

by iMac 2017. 2. 26.

전쟁 중 녹음


꽤 오래 전, DG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전쟁 중 녹음 시리즈를 처음 출시하던 때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상황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클래식을 막 듣기 시작한 무렵이라 푸르트벵글러를 잘 모르던 때였지만 어쩐지 상당한 화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는 잘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이긴 하다. 최신 녹음도 아니고 2차대전 중 녹음을 재발매한 것으로 화제였다니. 






푸르트벵글러 - 전시 녹음 5 & 7번 교향곡. 이 사진만 보면 왜인지 늘 가슴 한켠이 먹먹해진다



사실 이 녹음들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시피, 2차대전 직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녹음 테잎 원본을 가져가 버린 것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극적으로 반환하면서 DG에서 발매하면서 유명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해적판 음원이 돌아다녔다고는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제대로 재발매 되면서 새롭게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후 원본을 가져갔던 러시아 멜로디아 레이블에서도 시리즈물이 쏟아져 나오고 각종 소스를 통한 발매가 이어지면서 이제는 여러 가지 음원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이들 연주에 대한 호불호는 제쳐두고 일단 연주기록 그 자체의 중요성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베토벤 교향곡 애호가라면 더더욱.


여러 작품들의 녹음이 남아 있지만, 일단 베토벤 교향곡에 한정해서 정리하면 3, 4, 5, 6, 7, 9번을 들을 수 있다. 음반마다 조금씩 기재된 날짜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략 정리하면 연주일자는 아래와 같다. 대부분 라이브 녹음이고, 영웅 교향곡의 경우는 청중 없이 무직페라인에서 라디오 방송용으로 녹음한 것으로 알고 있다. 9번의 경우 논란의 된 히틀러 생일기념 공연실황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음질이 열악해서 감상에 적절하지는 않은 듯. 일단 일반적으로 알려진 아래 음원들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해서 연주의 긴장감을 잘 전해주고 있다. 


  • 교향곡 제3번 '영웅' - 빈 필, 1944.12 19/20

  •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 1943.6.27/30

  •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 1943.6.30

  • 교향곡 제6번 '전원' - 베를린 필, 1944.3.20/22

  • 교향곡 제7번 - 베를린 필, 1943.11.3

  • 교향곡 제9번 '합창' - 베를린 필, 1942.3.22/24



절정의 기록


사실상 베토벤 교향곡 지휘자로서 푸르트벵글러가 그 정점을 찍은 연주들은 바로 이 시기의 기록들이라고 생각한다. '절정의 기록'이라고 칭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토스카니니와의 비교는 여전히 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긴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그렇긴 해도, 아주 타이트하게 조여진 토스카니니에 비하면 육중하고 몽환적인 푸르트벵글러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그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선택지로 보고 싶다.


전후의 녹음들이 살짝 느슨하고 중후함이 더해졌다면 이 시기의 녹음들은 어마어마한 무게감에 소리의 집중력이 더해져서 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한다. '맹렬하게 부풀어오른다'는 어휘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고, 전체적으로 느릿하지만 그 속에 적절한 운동감도 갖추고 있어 어느새 적절한 템포처럼 들리는 마법을 발휘하여 듣는 이를 빨아들인다. 물론, 보다 경제적인 울림을 원하는 취향이라면 딱 질색일 수도 있는 것은 사실. 


모든 연주들이 다 대단하긴 하지만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연주는 역시 3번과 7번. 유일하게 빈 필과의 기록인 1944년의 영웅교향곡 녹음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아우라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엄청난 집중력과 무게감 속에 용솟음치는 연주.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3번 녹음 중 제일 첫 손에 꼽고 싶다. 3번은 이 외에도 좀 더 들어보고 싶은 연주가 더 있는 반면 7번은 단연코 이 연주가 푸르트벵글러의 베스트 녹음이다. 1악장 첫 시작부분이 정말 쇼킹한데, 그 어떤 연주보다도 충격적이다. 단단한 집중력과 무게감을 실어 내리꽂는 타격에 가슴이 철렁할 정도인데, 처음에는 소리의 위력에 놀라지만 조금 지나면 놀랍도록 질서정연한 소리의 조형에 한 번 더 놀라게된다. 무작정 힘만 가득 실은 연주가 아닌, 놀랍도록 정교한 음향설계인 것이다. 다른 건 다 놔두고라도 3번과 7번은 필청이다.



타라 레이블 전시녹음 세트일본 델타 클래식 - 우수한 복각멜로디아 시리즈



예술가와 정치, 그리고 음악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집권시기 독일에서 취한 행보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아주 분명하게 미국에서 자리잡고 활동한 토스카니니의 모습 때문에 독일에 남아 있었던 푸르트벵글러는 그 자체로 나치 부역자로 전후 아주 곤란한 입장이 된다. 하지만 세상일은 매사 그렇게 흑백으로 분명하게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정치적인 통제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엄혹하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에게 엄격한 단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공평한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문제이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음반을 들으면 특히나 9번 교향곡의 경우 묘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인류애를 노래하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라니. 심정적으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다분히 이율배반적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서인지 연주 전반의 분위기는 사뭇 치열하고, 처절하게 느껴진다. 긴장감이라는 점에서는 푸르트벵글러의 9번 교향곡 연주 중 최고이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아이러니.


이토록 어려웠던 시기에, 더군다나 전쟁 후반기로 접어들 수록 베를린에 수시로 폭격이 가해지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속에서 이토록 놀랍도록 집중력을 발휘한 연주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의 교훈을 전해주는 생생한 현장의 기록인 동시에 음악적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그 당시까지 독일에서 이어져 내려온 베토벤 교향곡 연주관행의 정점을 찍은 연주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비교불가의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