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lassical Music/beethoven

베토벤 교향곡 제2기 #4 - 푸르트벵글러/베를린 필

by iMac 2017. 2. 5.

대결구도에 대하여


'누구 대 누구'와 같은 대결구도로 표현되는 방식을 세상사람들은 참 좋아한다. 스포츠 경기나 바둑 장기 같은 분야라면 모를까 음악분야에서도 이런 수사가 종종 적용되는 것을 보면 새삼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해석의 변천을 이야기하면서 음악을 처음 듣던 시절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대표적인 것이 주지주의 대 주정주의 같은 표현이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토스카니니 VS 푸르트벵글러의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해서 정리해버린 개념이고 그러한 틀을 정해 놓고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방식은 이제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있는 그대로 내 귀에 들리는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싶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c단조 op.67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지휘

베를린 필하모니 (1937년 HMV녹음)



니키쉬의 후계자


베토벤 교향곡 초창기 녹음의 첫 시작에서 살펴보았던 아르투르 니키쉬가 1922년 사망하면서 그가 맡고 있던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두 곳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듯이 차지한 것이 바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ängler, 1886~1954)이다. 브루노 발터도 베를린 필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다지만, 결국 한참 후배인 푸르트벵글러에게 밀린 셈이다. 36의 나이에 이정도 자리를 맡았으니 오늘날 개념으로 생각해 보아도 정말 대단한 능력이긴 하다.





베토벤 교향곡 5번


베토벤의 교향곡 5번 하면 이제 푸르트벵글러의 이름을 빼놓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일종의 신화처럼 되어버린 상황인데, 이것에 거부감을 지닌 사람도 있고 여전히 열렬하게 추종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타라 레이블에서는 예전에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연주한 5번 교향곡 녹음 세 종류만 모아 놓은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이 음반에는 1937, 1943, 1954년 세 종류의 녹음이 수록되어 있어서 해석의 흐름을 한 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심지어 첫 번째 CD에는 각각의 녹음에서 각 악장별 동일한 대목을 발췌 편집해서 바로 들으면서 비교까지 가능하게 29개 트랙으로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타라 레이블 자체가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집중적으로 발매하는 곳이니 가능한 기획일 것이다. 아무튼 재미있는 음반인 것은 사실이다.




전쟁 중 녹음인 1943년이나 완전 말년인 1954년에 비해 1937년 녹음은 좀 더 차분하고 균형잡힌 모습이다. 말하자면 다른 두 녹음들에 비해 잘 차려입고 사진관에 가서 찍은 기념사진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제대로 준비한 스튜디오 녹음이어서 더 그럴 수도 있겠다. 이 녹음에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루바토는 덜하고 모든 것이 의외로(!) 자연스럽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물론 푸르트벵글러 특유의 육중하게 짓누르는 무게감은 여전하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할 사람은 열광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질색일 것이다. 


나중에 녹음된 격정적인 실황녹음이나 전후에 녹음된 보다 우수한 음질의 녹음들에 비해 사람들이 푸르트벵글러에게 기대하는 기적적인 아우라는 조금 부족한 편이긴 하지만 이 시기의 푸르트벵글러의 스타일을 잘 포착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꼭 들어볼만 하다. 적당히 격렬하며 적당히 묵직하고 동시에 전체적으로 세밀하게 신경쓴 것이 역력하게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마지막 악장의 마무리는 역시나 가속 페달을 한껏 밟아대지만 그래도 나중의 다른 연주들에 비하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토스카니니가 들려준 명석하고 강렬한 연주에 비하면 소리의 모서리가 둥글고 보다 묵직하며 흡사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 처럼 트릿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구조에 악기간 균형에 대해 섬세하게 다듬어서 이끌어가는 손길이 느껴진다. 개성이 전혀 다르긴 하나 이 또한 매력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늘 비슷한 스타일의 연주만 들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듣고 싶은 스타일이 달라지기에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토스카니니이든 푸르트벵글러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