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생각
사람 머리 속 생각이 이렇게 다를까 싶다. 같은 사물, 상황을 두고도 사람들마다 인식의 차이가 엄청나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 앞서 살펴본 브루노 발터의 베토벤과 비교하면 클렘페러의 베토벤은 전혀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다.
오토 클렘페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불사조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1885~1973)는 브루노 발터와 마찬가지로 유태계 독일인 지휘자로서 1876년생인 발터보다는 9살 정도 연하이고 생전의 말러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공통점이 있다. 그 외에 존경했던 선배 말러와 마찬가지로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점까지 비슷한데, 공통점은 대략 거기까지인 듯.
예전에는 만년의 발터가 만들어낸 푸근한 음악 스타일 덕에 발터에 대해 고매한 인격자 처럼 추앙하던 분위기였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막연한 상상이었던 것 같고 요즘 이래저래 다른 정보를 접하기 쉬워진 오늘날에는 딱히 그런 사람도 아니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명한 다큐멘터리에서 노년의 클렘페러가 인터뷰 중 '발터는 moralist이고, 나는 immoralist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서슴치 않고 자신을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단언하는데, 오히려 다분히 위선적인 사람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발터에 비하면 훨씬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도덕하다는 표현에서 젊은 시절 유부녀와 바람나서 사랑의 도주를 했다가 남편에서 얻어맞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2차대전 중의 행보도 여러 모로 비교된다. 비록 나치에게 쫓겨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 까지는 비슷했는데, 비교적 여유롭게 미국생활을 즐기고 말년에는 비버리힐즈에서 안락한 노년을 보낸 발터와 달리 클렘페러는 미국에서 지휘 중 떨어져서 머리를 다치면서 오랫 동안 활동을 못하며 불우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낸다.
유럽에 돌아와서도 이래저래 순탄치 못했는데, 파이프담배 물고 잠들었다가 불이나서 얼굴에 큰 화상을 입는 등 생명이 위태로운 고비를 여러차례 맞게 된다. 그래도 그때마다 고비를 넘기고 재기에 성공했으니 그야말로 '불사조'라고 부를만 하다.
필하모니아
순탄치 못한 역경을 거쳐 만년의 클렘페러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비로소 '정착'한다. 1920년대 베를린 크롤 오페라 시절에 이어 비로소 평온한 노년을 보낼 근거지를 찾은 셈이다. 필하모니아는 EMI의 월터 레그가 레코딩 용으로 만든 오케스트라로서 전쟁 후 활동에 제약이 있던 카라얀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어 주었는데 카라얀이 베를린 필로 떠나면서 클렘페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후 오케스트라 이름이 바뀌는 과정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클렘페러는 1959년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필하모니아와 함께했다. 그 후 무티가 1973년에 후임이 되었으니 뭔가 갑자기 세상이 바뀐 느낌이 든다. 19세기출신 지휘자에서 한 순간에 20세기 출신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흡사 순간이동같다.
전혀 다른 베토벤
서두에도 밝혔듯이, 클렘페러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발터의 그것과 연이어 비교해서 들으면 정말로 많이 다르다. 발터의 연주가 전체적으로 푸근하고 유려하며 동시에 전형적인 형태의 베토벤 연주상을 아주 노련하게 그려내고 있다면(비록 오케스트라가 많이 불안하지만), 클렘페러는 훨씬 직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소리의 아름다움같은 것은 그다지 관심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고 클렘페러의 관심은 작품의 엄정한 구조에 집중되어 있다. 반복구의 이행도 오늘날 기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발터보다는 훨씬 많이 따르고 있다. 5번 교향곡 4악장 제시부도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 들었을 때 놀랐던 기억이 난다. 또한 노년의 클렘페러가 느리게 지휘한다는 평이 있지만 이 베토벤 연주들은 그렇게 느리지도 않다. 9번 교향곡 3악장도 15분으로 주파하고 있는데 푸르트벵글러의 20분에 비하면 쾌속이다.
전체적인 음향은 차돌처럼 단단하고 차갑게 다가온다. 이런 걸 두고 일견 '독일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듣다보면 딱히 그렇게 정의내리는 것이 그저 '막연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클렘페러의 베토벤은 단단하고, 차갑고, 무거우며 동시에 투명하고 무뚝뚝하면서 적절한 템포로 너무 지루하지도 않게 음악이 잘 흘러간다. 여러모로 다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처음 충격적이었던 것이 구조적인 '투명함'이었다.
단적으로 5번 교향곡 1악장 전개부 중반 목관을 살리기 위해 현을 극도로 줄여버리는 대목이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그 외에 어느 누구의 연주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요즘은 그 대목에서 목관의 활약을 잘 부각시키려고 지휘자들이 밸런스 조정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긴 해도 여전히 일부 지휘자들의 연주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쯤되면 클렘페러의 베토벤 해석에 딱히 전통적인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 무의미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작곡가이기도 했기에 작곡가로서의 엄정한 관점으로 베토벤의 교향곡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연주 전반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요즘의 현대적인 연주들에 비하면 여전히 악기간 밸런스 측면에서 옛스러운 점들이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니크한 연주이다.
폭신폭신 발터의 연주를 듣다 클렘페러로 넘어오면 딱딱하고 무뚝뚝한, 그야말로 불친절한 음향에 놀라게 되지만 조금 듣다보면 단단하게 조형된 연주의 매력에 묘하게 빠져들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확실히 카라얀이 필하모니아와 함께 녹음한 전집보다는 클렘페러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카라얀의 전집도 멋진 연주들이긴 하지만 클렘페러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풋사과같은 기분이 든다.
2017/03/29 - [Classical Music/beethoven] - 베토벤 교향곡 제5기 #4 - 카라얀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나중에 새로 발매된 클렘페러 전집 세트 중 베토벤 관현악 작품 녹음집에는 스테레오 전집 외에도 1955년 모노럴 녹음인 3, 5, 7번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3번 '영웅'은 흐름이라는 점에서 훨씬 낫다. 스테레오 전집의 영웅 교향곡도 유명한 연주였지만 55년 녹음은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연주이다. 녹음 성향도 많이 다른데 역시 EMI는 초기 스테레오보다 후기 모노 녹음이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들린다. 연주 또한 스테레오 녹음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생동감이 가득하다. 이 연주가 별도로 발매되었을 때 내지에 소개된 일화가 기억난다. 클렘페러가 영웅 교향곡을 지휘한 연주회가 끝나고 대기실로 카라얀이 찾아가 언제고 자신도 클렘페러처럼 장송행진곡을 지휘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전체적으로 단단한 구조적 건축물로서 베토벤 교향곡을 만들어가는 스타일로 머리카락 흩날리듯 질주하는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다. 전투적인 베토벤상과도 다르지만 그렇다고 인습적인 해석도 아닌 정말로 독특한 해석이다. 음악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발터보다 흥미로운 점이 더 많다. 여러 차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그런 연주로서 베토벤 교향곡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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