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 기록 정리
내맘대로 정리한 베토벤 교향곡 시리즈 제3기는 2차대전 중의 중요 녹음 세 종류로 마무리했다. 사실은, 더 찾아보니 젊은 시절 카라얀이 녹음한 3번과 7번 녹음도 있긴 한데, 기록 자체로 중요하긴 하나 적어도 현재까지 나에게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아서 생략했다.
토스카니니, 멩겔베르크, 푸르트벵글러. 전쟁 중 토스카니니는 미국에, 나머지 두 사람은 나치 독일치하 유럽에서 활동했고 그 후 결과는 잘 알려져 있듯이 멩겔베르크는 영영 고국땅에서 지휘봉을 들 수 없게 되었고 푸르트벵글러는 패전 직전 스위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이후 한동안 활동을 재개하지 못하게 된다.
2017/02/19 - [Classical Music/beethoven] - 베토벤 교향곡 제3기 #1 - 토스카니니/NBC심포니 (Music & Arts)
2017/02/22 - [Classical Music/beethoven] - 베토벤 교향곡 제3기 #2 - 멩겔베르크 / 콘서트헤보우
2017/02/26 - [Classical Music/beethoven] - 베토벤 교향곡 제3기 #3 - 푸르트벵글러
간주곡?
'제4기'라고 제목을 지어놓고 '간주곡'이라고 부제를 달아 놓은 것은, 일단 대상이 전쟁이 끝난 45년부터 50년대 직전까지 전후의 혼란에서 막 벗어나던 시점의 녹음들을 잠깐 짚어 주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50년대부터는 가능하면, 개별 녹음이 아닌 전곡 녹음 위주로 정리하고자 한다. 물론 예외는 항상 있지만 어쨌든 큰 흐름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기본 원칙은 전곡녹음 위주로 정리하려 한다.
돌아온 거장들
교향곡 제5번 c단조 op.67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 (1947)
교향곡 제3번 Eb장조 op.55 '영웅'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1949)
푸르트벵글러의 베를린 필 복귀 연주회 실황은 2차대전 직후 베토벤 교향곡 연주 기록에서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다. 연주의 성과를 떠나서 배경 자체가 너무나 드라마틱하기도 하다. 녹음으로는 5월 25일의 것과 5월 27일의 것이 있고 DG녹음은 후자이다. 전자는 audite 레이블 등 기타 여러 음반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데 몇일 차이가 안나긴 해도 미묘하게 27일 연주가 더 낫게 들린다. 녹음상태도 27일 연주가 더 낫다. 앙상블이 좀 삐걱거리는 것은 둘 다 비슷하지만 그래도 나중 연주가 더 나은 듯.
개인적으로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 중 최고는 3번, 그 다음은 9번 정도로 생각하고 5번은 솔직히 좀 더 타이트하게 조여지고 다이내믹한 연주를 기대하는 내 취향에 안맞는 게 사실이지만 그나마 푸르트벵글러의 5번 중에서는 이 연주를 최고로 꼽고 싶다. 느릿하고 육중하지만 엄청난 밀도감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격정적인 움직임은 과연 대단하다.
토스카니니의 1949년 카네기 홀 녹음은 토스카니니의 영웅 교향곡 연주 중 - 무시무시하게 전투적이었던 39년 실황도 있지만 - 녹음상태까지 고려했을 때 최고의 완성도에 도달한 연주로 꼽고 싶다. 칼날같은 다이내믹, 숨막히는 집중력, 그 속에서도 순간순간 투명하기까지 한 앙상블. 일단 듣기 시작하면 멈출수가 없는, 푸르트벵글러와는 또 다른 의미로 강렬하게 청자를 빨아들이는 연주이다.
이 연주는 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시대악기 혹은 절충주의 스타일의 현대적인 연주들과 비교해도 전혀, 아니 오히려 더 다이내믹하고 명쾌하며 강력한 연주이다. 너무나 멋진 연주라서 개인적으로는 1악장의 반복생략과 코다부분 가필이 아쉽기만 하다.
독수리의 날개짓
교향곡 제5번 c단조 op.67
교향곡 제8번 F장조 op. 93
교향곡 제9번 d단조 op.125 '합창'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빈 필 (1948, 1946, 1947)
과거의 거장들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는 한 켠으로, 또 하나의 야심만만한 존재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으니 앞으로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에서 계속 언급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이다.
잘츠부르크 출신으로 아헨을 거쳐 베를린에 진출, 이후 '기적의 카라얀'이라는 별명까지 붙으며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 했지만, 그 과정에서 푸르트벵글러를 견제하려는 정권의 목적에 이용되기도 했고 그럼으로 인해 대선배인 푸르트벵글러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버렸다.
설상가상, 젊은 나이에 지휘자 자리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자의든 타의든 나치 당원에 가입하기까지 해서 전쟁이 끝난 후 그야말로 앞길이 막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토록 막막하던 그의 앞에 홀연히 등장한 EMI사 프로듀서 월터 레그(Walter Legge, 1906~1979).
월터 레그가 쓸만한 연주자들과의 계약을 위해 전후의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환경을 뚫고 빈에 도착하는 모습은 고전영화 '제3의 사나이'(The Thrid Man, 1949)의 한 장면같다. 이곳에서 카라얀이 지휘한 연주회를 월터 레그가 보게 된다. 이런 경우를 '엑스-마키나'(ex-machina)라고 해야할까?
이후의 과정은 잘 알려진대로, 카라얀은 월터 레그와의 계약 덕분에 공공 연주회활동에 가해진 제약을 레코딩 활동으로 교묘히 빗겨가면서 부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40년대 후반 카라얀이 빈 필과 녹음한 5, 8, 9번 교향곡 연주는 카라얀의 수많은 베토벤 교향곡 녹음 중에서도 최상의 결과물로 꼽기에 충분하다.
이들 연주의 공통점은 '결핍'으로 인한 욕구불만의 강렬한 분출로 정의내리고 싶다. 특히 5번 연주의 격렬함은 정말 아찔할 정도로 솔직히 내 취향으로는 푸르트벵글러의 47년 녹음보다 더 손이 간다. 젊은 카라얀이 추구했던,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를 결합한 해석이 바로 여기에 있다. 빈 필의 연주도 훌륭하고 무직페라인에서의 녹음 또한 나쁘지 않다. 이 무렵에 이미 카라얀은 모든 준비가 다 된 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비상의 날개짓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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