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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music note

BBC 뮤직 매거진 - 엘가, 에니그마 변주곡

by iMac 2017. 7. 29.

여름이 되니 급격히 지쳐가면서 포스팅도 시들해져갑니다. 여름철 모두들 건강관리 유념하시길..



님로드(Nimrod)


이야기는 앞선 포스팅 덩케르크에서 이어진다.( 2017/07/22 - [Note/diary] - 덩케르크(Dunkirk) ) 덩케르크의 음악을 맡은 한스 짐머(Hans Zimmer)는 영화 후반부에 엘가의 에니그마 변주곡 중 제9변주 '님로드'의 선율을 사용하고 있다. 변주곡에서 변주된 부분을 다시 가져다가 또 변주를 한 셈인데 원곡의 분위기가 그러했듯이 감동적인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더할나위 없이 멋지게 잘 어울린다. 장엄하게 고조되어 가며 절정에서 울부짖는 음악적 설계는 분명 다분히 상투적인 느낌이지만 언제 들어도 뭉클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에니그마 변주곡(Enigma variations)


공교롭게도 BBC 뮤직 매거진 5월호 'Building library'코너에 선곡된 곡이 엘가의 에니그마(수수께끼) 변주곡. 1899년 초연된 작품으로, 엘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이 곡은 잘 알려져 있듯이, 엘가 본인의 주제를 사용한 변주곡으로 각각의 곡이 이니셜로만 기재되어 있어서 수수께끼 변주곡이라고 하는데 각각의 곡이 엘가의 지인들을 상징하며 마지막 대단원은 엘가 본인으로 끝맺고 있다. 9곡 '님로드'는 성서에 나오는 사냥꾼의 이름으로 음악 출판업계에서 일하면서 엘가에게 음악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독일계 친구 'Augustus Jaeger'(1860~1909)를 위한 곡이고 독일어 'Jäger'(예거)가 사냥꾼을 뜻하니 같은 뜻의 다른 단어를 사용한 언어유희라고 보면 되겠다.


위키피디아 해당 항목에는 엘가가 이 곡을 작곡한 배경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어느날 의기소침해 있던 엘가를 찾아온 예거가 베토벤의 예를 들면서 힘을 내라고 격려하면서 비창 소나타의 2악장 선율을 노래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엘가는 이 곡이 친구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작곡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각상실이라는 역경을 딛고 위대한 음악을 작곡한 베토벤의 일화를 친구가 흥얼거린 비창소나타 선율과 함께 떠올리며 느낀 심상. 그러고 보면 도입부 선율 진행이 아주 살짝 비창 소나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엘가를 열심히 듣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몇 곡은 나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따라하자면.. 엘가, 하면 역시 '사랑의 인사'이고, 그 다음은 '위풍당당 행진곡' 1, 4번, 불후의 명작 첼로 협주곡, 에니그마 변주곡, 전주곡과 알레그로 정도를 꼽고 싶다. 그 외 조금 더 나아가면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1, 2번까지. 여기까지가 내가 듣는 엘가의 작품들이다. 


에니그마 변주곡은 이 중에서도 꽤 일찌감치 접한 곡인데, 처음엔 첼로 협주곡 음반에 커플링된 곡으로 듣게 되었다. 뒤 프레와 바렌보임이 협연한 첼로 협주곡 음반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보편적인 추천음반은 아닌데 이 곡을 처음 접하면서 왜 이걸 골랐는지 기억이 안난다. 뒤 프레의 말년 라이브 녹음이라 녹음상태도 이상적이지 못하고 연주 자체의 완성도도 바비롤리와의 스튜디오 녹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바렌보임이 런던 필을 지휘한 에니그마 변주곡 스튜디오 녹음이 더 귀에 잘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은 꽤 훌륭한 작품이긴 한데, 내가 생각하기에 위상이 좀 애매하다. 연주효과가 좋아서 사실 어느 음반을 골라도 그런대로 들을만 하다는 점이 함정인데, 뒤집어 생각하면 다 그게 그거 같아서 결정적인 명반을 고르기가 애매해진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엄청난 걸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점이 엘가의 한계인 것 같다. 그래도 이 곡 중에서 '님로드'만큼은 결정적인 한 순간으로 인정할만 하다. 언제 들어도 감동적인 건 사실이다.


아무튼, 그래서 BBC뮤직 매거진의 추천음반들에 대해서도 큰 감흥은 없다. 언젠가도 썼듯이, 내 취향과 추천이 늘 일치하지는 않다. 베스트 레코딩으로 마크 엘더/할레 오케스트라의 음반을 꼽았는데 애플뮤직으로 들어본 느낌은 그냥 나쁘지 않은 정도. 훌륭하긴 하나 엄청나게 인상적이지는 않고, 할레 오케스트라 라이브 시리즈인지라 실황녹음 특유의 음향 특성 탓에 입체감, 중량감이 아쉽다.






이것보다는 내 취향엔 그 다음에 소개된 에이드리언 볼트/런던 심포니의 전통적인 명반이 여전히 최고다. 너무 뻔한 추천같지만 다시 들어도 이만한 연주를 찾기 쉽지 않다. 볼트의 지휘는 그야말로 단정한데, 그러면서도 섬세한 디테일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다. 과장되지 않으면서 표현해야할 것 어느 하나 간과하지 않는 모범적인 연주. 예전 지휘자 답게 울림 자체가 전해주는 묵직한 중량감도 아주 만족스럽다. 1970년의 녹음으로 에리드리언 볼트(Adrian Boult, 1889~1983)가 80이 넘었을 때 녹음이지만 연주에서 노쇠한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이 놀랍다.


그 외에도 집안 곳곳에 이 곡의 음반이 여기저기 숨어 있는 것 같은데 다 찾기도 좀 귀찮다. 이제 어지간한 것은 애플뮤직에서 다 들을 수 있으니 더더욱 꺼내기 귀찮아 진다. 대략 생각해 보면 바렌보임, 솔티, 시노폴리, 콜린 데이비스 정도인 듯. 다들 나름 나쁘지 않고 녹음도 훌륭하다. 앞서 말했듯이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면 작품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고 연주효과가 좋아서 다 들을만하다. 그래도 나에게 하나만 꼽으라면 이 곡에 관해서는 역시나 볼트 하나로 충분히 만족한다.



*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님로드'. 덩케르크를 보고 와서 보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세월의 무상함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