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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Music/music note

시벨리우스 교향시 전설 (En Saga) - 카라얀

by iMac 2017. 1. 15.


시벨리우스



개인적으로 시벨리우스를 나름 좋아한다. '나름'이란 표현은 아주 매니악한 정도는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좋아하긴 하는데, 아주 샅샅이 파헤치거나 열심히 연구하는 정도는 아닌 그런 정도. 그래도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은 그 분야 최고의 걸작들 중 하나로 손꼽고 싶다. 


간만에 써늘한 한겨울 칼바람이 부는 오늘 문득 시벨리우스의 '전설'이 생각났다. 현재 진행중인 베토벤 교향곡 시리즈 처럼 시벨리우스 교향곡에 대해서도 포스팅해보고 싶어 일단 짤막한 교향시 한 곡으로 살짝 운을 떼 본다. 




카라얀/베를린 필 (1976년)



엔 사가, 어떤 전설 (En Saga, op.9)



이 작품은 시벨리우스가 베를린, 빈 유학(1889~1891)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1892년 작곡 후 1901년 개정한 작품으로 비교적 초창기 작품인데 젊은 시절 작곡한 관현악 작품 중에서는 그래도 비교적 자주 지휘자들의 선택을 받는 맨 첫곡이다. 최초의 성공작인 쿨레르보 교향곡 op.7은 너무 규모가 크고 여전히 살짝 낯설고 덜 여문 듯한 느낌이 있다면 이 작품은 연주시간도 통상 20분 안쪽인데다 한 번 개정을 거쳐서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큰 어색함 없이 잘 들을 수 있다.


'사가'라는 제목부터 어감상 우선 어딘지 모르게 미지의 느낌을 주는데 북구의 전설을 총칭하는 의미로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인상을 준다. 제목은 붙어 있으나 이후의 다른 작품들처럼 프로그램이 있지는 않은 듯. 아무튼 몽환적이며 동시에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 살짝 촌스러운 듯 하면서 중독성 강한 리듬이 반복되며 절정과 하강을 반복하는 식으로 곡이 진행된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곡의 첫번째 전개 이후 등장하는 비올라의 집요한 주제선율이 인상적이었다. 촌스러운 민속 무곡풍의 주제를 집요하게 반복하는데 이 선율이 의외로 중독성 있다. 계속 듣고 싶어지는 묘한 매력이 있는데 모티브의 집요한 반복이라는 점에서 브루크너가 연상된다. 아닌게 아니라, 시벨리우스는 빈에 유학하던 시절 브루크너의 교향곡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한다. 유학 당시 아직 브루크너도 살아 있었고 빈에서 연주된 3번 교향곡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니 더더욱 브루크너적인 어법이 연상된다. 



음반들



가지고 있는 음반들을 꺼내보는데 요즘은 사실 애플뮤직도 있으니 비교감상 범위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그걸 일일이 다 듣기도 벅차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대략 몇가지만 참고해도 충분할 듯 하다.


워너에서 출시한 7장짜리 세트음반은 시벨리우스 생전에 이루어진 히스토리컬 녹음들을 한번에 구입할 수 있어 간편하다. 영국 지휘자 토머스 비첨/런던 필(1879~1961)의 1939년 녹음은 모든 면에서 표준적이라 하겠다. 템포, 프레이징 어느 하나 더도 덜도 아닌 절도 있는 접근을 구사하는데 음악을 다듬는 손길이 정말 노련하다. 음악의 윤곽도 또렷하고 디테일의 묘사도 철저해서 새삼 비첨의 지휘에 감탄했다. 왜 후세 지휘자들은 이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비첨, 푸르트벵글러콜린 데이비스 - 보스턴, 런던잔데를링, 네메 예르비





푸르트벵글러/베를린 필의 1943년 전쟁 중 녹음은 그답게 살짝 느릿하고 묵직한 몽환적인 연주인데 역시 진한 밀도를 보여주며 광포하게 휘몰아친다. 이 작품 연주를 손쉽게 비교감상하려면 곡의 맨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을 들어보는 것이 빠른데, 명쾌하게 절정을 구축해가는 비첨의 연주와는 또 다른 거칠게 포효하는 압도적인 연주이다. 실황녹음이라 음향상태는 살짝 고르지 못하지만 충분히 즐길만 한 전설의 기록.


그 외에는 의외로(!) 이거다 싶은 연주를 찾기 쉽지 않다. 베를리오즈와 함께 시벨리우스 교향곡에도 평생에 걸쳐 천착해온 콜린 데이비스의 연주도 딱히 나쁘지는 않은 정도인데 콜린 데이비스의 두 종류 연주(보스턴 심포니 81년, 런던 심포니 94년) 모두 비첨이 보여주었던 절제와 단호함이 아쉽다. 거대하게 움직이는 관현악단을 조였다 풀었다 제어하면서 음악을 다듬어 가는 것이 정녕 쉽지 않은가 보다. 작곡가의 초기작품임에도 결과물을 보면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못하다. 


쿠르트 잔데를링/베를린 심포니(70년), 네메 예르비/예테보리 심포니(92년) 모두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콜린 데이비스보다는 좀 더 나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수준이라하겠다. 특히 예르비의 연주는 녹음상태가 아주 우수해서 소리 자체가 매혹적이다. 그 외 애플뮤직에서 들어본 오스모 밴스캐/라티 심포니의 연주도 들을만 했다.





카라얀/베를린 필



이리저리 몇가지를 들어보긴 했는데, 결론은 좀 뻔한 감이 없진 않지만 역시 카라얀/베를린 필의 1976년 녹음이다. 예전에 장만했던 EMI  전집 세트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후 새로 리마스터링되어 나온 워너의 새로운 세트의 음질은 비교 불가다. 진작 이렇게 해줄 것이지. 이거에 비하면 카라얀 100주기를 맞아 EMI에서 내놓았던 세트는 이제와 생각하면 리마스터도 되지 않은 민망한 수준이었다. ( 2009/04/05 - [Classical Music/music note] - EMI - 카라얀 전집 )


아무튼, 카라얀/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전설'은 그 자체로 '전설'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당시 최전성기를 자랑하던 베를린 필의 압도적인 합주력이 가히 무시무시하다. 비교감상을 위해 제일 먼저 들어보는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연출은 정말 최고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는 느낌이 바로 이럴 때 쓰는 표현인데 절정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면서도 각 악기군의 고도로 세련된 음향 또한 양보하지 않는다. 비첨과 푸르트벵글러를 제외하면 템포, 프레이징, 악기간 밸런스, 철두철미한 완급 조절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언급한 연주들을 간단히 압도한다. 적절한 잔향과 선명함을 유지하는 녹음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숨막힐듯 몰아치는 북풍한설같은 아찔함을 안겨주는 현의 운궁은 몇번을 들어봐도 신기하다. 과연 어떻게 이렇게 했을까? 왜 다른 연주들은 이런 맛을 내지 못할까? 음악적 완성도를 위해 조금의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은 압도적인 연주로 관현악 합주기술의 극한까지 밀어붙인 경지를 보게된다. 


앞으로 또 누구에게서 이런 수준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슬프게도 세상은 달라졌고 그럴 일은, 이제,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이 음반은 낱장으로도 발매되어 있으며 카라얀이 즐겨 연주하던 투오넬라의 백조, 카렐리아 모음곡, 핀란디아, 슬픈왈츠, 타피올라가 수록되어 있다. 시벨리우스를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