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번 트램
벨베데레 하궁에서 나와 중앙묘지행 트램을 탄다. 오페라극장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벨베데레 궁은 동남쪽으로 길게 전개되어 있고 벨베데레궁에서 다시 동남방으로 가면 중앙묘지가 나온다.
하궁 앞 정류장에서 71번 트램을 타면 되는데,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다가 빈에서는 누군가 죽었을 때 살짝 우스개소리 처럼 '그 사람 71번 트램 탔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71번 트램이 중앙묘지행이니 그걸 탔다면 말 다한셈이다. 블랙유머라고 해야하나?
빈 중앙묘지 -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하지만 우리는 관광객이니, 우리가 71번 트램을 탄 이유는 당연히, 그곳에 모여있는 유명 작곡가들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서이다. 잠시 기다려서 곧 71번 트램을 타고 대략 20분 남짓 달려서 중앙묘지 2번 문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1번문앞에서도 정차하니 잘 보고 내려야할 듯. 규모가 꽤 커서 잘못 내리면 상당히 오래 걸어야할 것 같다.
벨베데레 하궁 정류장 | 71번 트램 |
빈 중앙묘지 (Wiener Zentralfriedhof)
무사히 빈 중앙묘지 2번 문앞 정류장에 하차. 내려 보니 꽃가게가 보인다. 와이프가 꽃을 고른다. 작은 꽃묶음 하나 2유로에 구입하고 묘지로 들어서니 정말 규모가 광대하다. 2번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것까지만 생각하고 그 다음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규모에 순간 당황했다. 다시 찾아보니 음악가 묘역은 32A구역이다. 2번 문으로 들어가서 계속 직진하다가 왼편에서 32A구역을 찾으면 된다.
중앙묘지 2번문 앞 정류장 | 묘지 입구 앞 꽃집들 | 2유로 화환 |
음악가 묘역
음악가 묘역앞에 다다르면 'Musiker'라는 안내 표지판도 보이고 무덤 배치도도 붙어 있다. 일단 여기까지 오면 다 온 것이다. 그 다음은 그저 고요함 속에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주변 풍경을 눈에 담으면 된다. 잘 알려진대로, 모차르트 기념비를 중앙에 두고 베토벤, 슈베르트의 무덤이 맨 처음 눈에 들어온다.
음악가 묘역 표지판 | 좌 베토벤, 우 슈베르트 | 베토벤 무덤에 헌화 |
베토벤 무덤앞에 꽃집에서 사온 꽃을 헌화하고 묘비를 올려다본다. 그래, 내가 이분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 아니던가? 한참을 둘러보는데 보고 또 봐도 벅차오르는 묘한 감상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주변 벤치에 앉아 둘러보니 우리 말고도 종종 관람객들이 오고 가며 음악가들 묘비 앞에서 한참을 올려다 보다 가곤 한다. 개중에 일본인인듯한 노부부와 사이클복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와서 베토벤 묘비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서양인 남성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음악의 위대함이란..
베토벤 | 모차르트 | 슈베르트 |
이들 주변에서 또 다른 사람을 찾으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가 나란히 묻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외모로는 참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생전에 절친이었고 사후엔 나란히 묻혀 있다. 미쳐 죽은 불쌍한 후고 볼프도 보이고 그 외 왈츠가문인 슈트라우스 패밀리의 여러 사람들도 보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 브람스 | 볼프 |
어느덧 시간은 오후 3시 반경. 다시 벨베데레 궁으로 가려고 중앙묘지를 나선다. 입구에는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 서 있는데, 잘 보면 한쪽은 건립 당시 빈 시장이었던 '칼 루에거'의 이름이, 다른 한쪽 기둥에는 당시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칼 루에거(Karl Lueger, 1844~1910)는 히틀러의 선구자격인 대중 선동정치가로서 반유태주의적인 정치구호를 내세워 여러 차례 빈 시장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이런 건축물에 이름이 남아 있는 것 처럼 시장으로서는 유능했다고 하는데,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러한 루에거의 정치적 입장이 못마땅해서 시장 임명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의 임명을 거부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얼마전에 아슬아슬하게 결론이 난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가 오버랩되면서 묘하게 씁쓸하다.
중앙묘지 문 앞 기둥 | 살름 브로이 립 | 숙소로 돌아가는 길 |
살름 브로이 (Salm Bräu)
다시 71번 트램을 타고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벨베데레 하궁앞에 내리면 부근에 있는 음식점 살름 브로이에서 늦은 점심겸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름 검색이 많이 되는 집이었는데 주로 많이 시킨다고 하는 립을 시켰는데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낯선 맛은 전혀 아닌, 아주 친숙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먹어본 그런 맛. 여기서도 감자 샐러드를 주문했는데 피글뮐러보다는 맛이 덜했다.
먹고 나와서 다시 트램을 타고 오페라 극장쪽으로 돌아왔다. 조금 일찍 내려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트램을 타고 간편하게 일주하면서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빈의 구조가 정말 맘에 들었다. 인생여행지를 찾았다고나 할까?
도시의 화려함과 규모, 객관적인 아름다움에서는 파리가 물론 압도적이지만, 돌아다니기 편안하고 보다 깨끗하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점에서는 빈이 훨씬 내 취향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파리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도로와 건물 사이에 가로수와 인도 등이 아주 넓고 여유롭게 확보된 도로 구성은 정말 부러웠다. 도심을 걸으면서 이렇게 넉넉하고 여유로운 기분이라니.
천천히 걸어서 숙소에 돌아와 잠시 쉬면서 저녁 연주회에 갈 준비를 한다. 파리가 더 아름다운 건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파리엔 빈 필이 없다. 그래, 파리도 좋았지만, 나에겐 그게 더 중요하다. 드디어, 빈에서 빈 필의 연주회를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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