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이라는 단어는 어감부터가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것으로서 뭔가 어느 한가지에 집중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이 다소 과다하게 느껴지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듯.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도 물론 취미생활의 일종이다보니 사람마다 저마다 편차가 존재하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묘한 중독성을 느끼는 작곡가가 있게 마련이다. 없으시다면 이쯤에서 패스~
얼마전 뇌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긍정적인 생각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뇌속에서 분비되는 각종 호르몬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함을 알게되었다. 대강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가 뇌속에서 천연 화학물질을 분비하고 있으며 그것이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거둔다는 것. 달리기에 미친 사람은 달리는 동안 쾌감을 자극하는 물질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 역시 그러한 내용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 뇌 (정말로 흥미진진!)
아무튼, 어떤 특정한 작곡가의 작품에 집중적으로 빠져드는 현상도 그러한 뇌속의 작용에 의한 것이리라. 물론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는 그러한 영향력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또 특정한 작곡가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경험은 좀 더 유별난 현상이다.
바그너
생각해보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바흐등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위대하고 동시에 상당히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닌 작곡가들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모든이들이 존경하는 존재들은 '중독'이라는 다소 위험해 보이고 병적인 치우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결국 이러한 경향의 대표주자라면 단연 바그너를 꼽게 된다. 바그네리안이라는 단어가 형성되었을 정도이니..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사이비 종교신자들 같은 황당하기 그지없을 현상이다. 그 이후에 등장한 여러 작곡가의 이름에 ~ian이라는 단어를 붙여 만든 추종자 그룹은 모두 바그네리안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하르트 바그너 (1813~1883)
사실 그의 작품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행적 자체가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이거나 아니거나로 구분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 어느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상연을 위한 전용공간을 만들었단 말인가? 요컨대 말년의 바그너는 이미 살아 생전에 적어도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살아 있는 신처럼 군림했다.
그럼... 나는 어떠한가? 바그너를 무척 좋아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그네리안이라고 말하기에는 자질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바그네리안이라기에는 베르디도 상당히 좋아하고 베르디의 후기 작품들이 바그너 스타일에 물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바그네리안은 아닌 것 같다. 더군다나 최근 1~2년간은 바그너 작품에 다가간 것이 아주 뜸했으니...
그럼... 나는 어떠한가? 바그너를 무척 좋아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그네리안이라고 말하기에는 자질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바그네리안이라기에는 베르디도 상당히 좋아하고 베르디의 후기 작품들이 바그너 스타일에 물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바그네리안은 아닌 것 같다. 더군다나 최근 1~2년간은 바그너 작품에 다가간 것이 아주 뜸했으니...
결론.. 바그너는 나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곡가이지만 그렇다고 바그네리안이라고 자처하기엔 그정도로 빠져들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니체처럼 그에게 환멸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바그너와는 그런대로 건전한 관계를 유지할 것 같다.
말러
이와 같은 그룹으로 강력하게 부상한 것이 바로 '말러리안'이다. 살아 생전에는 작곡가로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비해 푸대접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멋지게 역전에 성공한 상태. 젊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 말러의 교향곡들이다.
구스타프 말러 (1860~1910)
공교롭게도 생전의 말러 자신이 바로 바그네리안 지휘자였다. 비록 유태인이긴 했지만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우뚝 선 존재였으며 바그너 악극 해석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그의 음악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말러는 오페라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교향곡들은 말없는 오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그 거대한 관현악의 움직임은 오늘날의 감상자를 단숨에 휘어잡기에 충분하다.
나 역시 말러의 교향곡들을 나름대로 좋아하면서 열심히 들은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종종 느끼는 것이 이를테면 베토벤이나 브람스등의 교향곡만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또한 그의 음악속에 과도하게 담겨진 사적인 감정이 종종 부담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그너의 경우 상당히 현란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한발짝 떨어져서 경탄하는 것이 가능하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경우는 철저히 냉소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렇지 않은데 비해 말러는 상당히 고통스럽다. 뭐가 그리도 고민이었는지...
결국 말러의 교향곡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에게 있어 음식에 비유하자면 가끔 생각날때 찾게되는 '특식'의 영역에 해당하게 되었다. 진수성찬이긴 하나 매일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메뉴인 것이다. 중독이 되기에 앞서 우선 몸에서 거부반응이 먼저 일어난 셈이다. 이렇게 되면 중독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상황. 모름지기 중독이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뒤 안가리고 빠져드는 현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실은, 거부 반응도 거부반응이지만 이보다 훨씬 강력한, 진정한 중독이라고할만한 존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브루크너
작년 언제가도 짤막하게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그 때의 기분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을 보면 확실히 브루크네리안이 되고 싶은 것 같다. 같다~라고 표현한 것은 나 자신이 아직은 주변의 진정한 브루크네리안들에 비해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라고 생각기 때문이다.
안톤 브루크너 (1824~1896)
사진을 보면 이 양반의 작품이 이런 마력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카리스마적인 바그너나 신경질적이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말러에 비하면 이건 뭐... 거의 듣보잡 수준이다. 음악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완전 시골농부아저씨.
그런데... 이 아저씨의 교향곡들이 나에게는 진정한 중독의 최강자로 생각된다. 정말 묘하게 중독적인 요소가 있는 작품들이다. 교향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품이 모두 11개인데 그들 모두가 다 비슷비슷한 인상을 주면서도 또 모두 다른 작품들로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패턴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몸집을 불려 나아간다.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주제 파악도 어렵겠지만 잘 들어보면 정말 집요하게 악구들을 반복시키고 있다. (주제파악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교향곡 0번의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 당대의 유명한 지휘자가 악보를 보다가 브루크너에게 주제가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는 이야기) 알게 모르게 이어지는 반복적인 주술의 마력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의 교향곡에는 말러의 그것처럼 특정한 줄거리나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청춘의 설레임이라던가 영웅의 죽음과 부활, 대자연의 위풍당당함, 천국과 지옥의 정경, 섬뜩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이미지, 괴기스러운 야상곡, 파우스트적인 세계관,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처절한 두려움... 말러의 교향곡에 담긴 모습들을 대강 정리하자면 이런 식인데 브루크너에겐 이런 식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인 넌센스다. 그러한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 대중적인 인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철저히 절대음향의 건축물로서 교향곡을 다듬어낸 그의 진중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벽돌을 쌓아올리듯 꼼꼼하게 패턴을 반복하면서 치솟아 오르는 장대한 음향의 건축물. 브루크너의 작풍을 바흐의 그것에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향곡의 바흐같은 존재.
위에서 열거한 말러 교향곡의 이미지들은 사실상 매일같이 듣고 있기에는 다들 너무나도 자극적인 소재들이다. 그에 비해 특정한 심상이 그려지지 않는 절대음악인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말하자면 쌀밥같은 존재들이다. 맹맹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오묘한 단맛이 우러나오는 그런.. 브루크너에 대한 중독이란 바로 이러한 경험인 것 같다.
낭만적인 표제나 심상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사람들도 있기는 마련이어서 그의 교향곡에 굳이 종교적인 신성함을 부여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가 우직하고 세상사에 어두운 순박한 종교인이기는 했지만 그의 교향곡은 어디까지나 교향곡이지 종교음악은 아니다. 장대한 아다지오 악장이나 곳곳에 등장하는 코럴풍의 금관악구들이 초월적인 경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정신적 고양감정도로 이해해도 보편적인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 종교음악을 원한다면 브루크너의 미사곡들이나 말년의 대작 테 데움을 찾아들으면 될 것이다.
4번 교향곡 '로맨틱'은 유일하게 표제가 붙은 작품으로 이 작품이 연상시키는 숲과 자연의 이미지는 초심자들에게는 그런대로 먹혀들어가는 것 같다. 나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이미지와는 관계없이 작품을 듣게 된다. 사실 4악장에 다다르면 숲과는 전혀 동떨어진 음악이 펼쳐진다. 5번 교향곡을 성채와 기사의 여정에 비유한 해설도 있지만 그 또한 진정한 중독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요약하자면 바그너와 말러는 적어도 나에게는 중독이 일어나기에 앞서 발길이 뜸해진 편이고 특히나 말러의 자극적인 음악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발견한 브루크너에게 중독된 상황인 셈이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 그러고 보면 바그너, 브루크너, 말러는 모두 밀접한 상호관련이 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3번 교향곡을 직접 헌정할 정도로 바그너를 존경했다. 말러 역시 바그너를 즐겨 다룬 지휘자였고 학생 시절에는 대참패로 끝난 브루크너의 3번 교향곡 초연당시 끝까지 남아 있던 소수의 청중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중독이란 것이 19세기말 후기 낭만파 음악의 전유물인 것 같이 생각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세 사람의 관계가 마냥 밀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바그너는 늘 브루크너를 추켜세웠지만 그의 교향곡을 지휘해 주지는 않았다. 립서비스차원이 아니었나 싶고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존경하기는 했지만 악극의 줄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고 관현악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오페라 다 보고 나와서 주변사람들에게 줄거리를 다시 물어보아서 황당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말러는... 제한된 숫자의 브루크너 교향곡들을 지휘하긴 했는데 그무렵에 다들 그러했듯 이리저리 가위질을 해댄 버전으로 지휘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종종 그러했듯 자신이 직접 이리저리 손을 보아서 지휘했던 것 같다.
* 나치스 정권이 하스의 브루크너 악보 편집사업을 전폭 지원했던 것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다. 순수한 게르만 정신의 결정체 운운.. 이것도 중독성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전쟁이 끝난 후 하스가 중도하차하고 노박이 뒤를 이은 것은 바로 그러한 나치 전력 때문이다. 실제로도 하스는 적극적인 나치 추종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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